평창동일번지 개관기념

김정원 피아니스트
살롱콘서트

음악이 머무는 시간

음악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대신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연주자와 청중이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공간의 울림을 나누는 순간, 음악은 조금 더 사적이고 친밀한 언어가 된다.

오늘의 음악회는 슈베르트의 조용한 독백으로 시작해 네 손이 함께 빚어내는 음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대화를 지나, 마침내 리스트의 풍부하고 장대한 피아노의 울림으로 마무리된다.

Franz Schubert

Impromptu No. 3 in G-flat major, D.899

Piano 김정원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중 제3번은 끊임없이 흐르는 부드러운 반주 위로 긴 호흡의 선율이 펼쳐지는 작품이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듯 시작되는 음악은 특별한 극적 사건 없이도 듣는 이의 마음을 깊숙이 움직인다.

1827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성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피아노 음악 가운데 하나다. 오른손의 노래하는 선율과 그 아래에서 쉼 없이 흐르는 음형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과 쓸쓸함이 스며 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때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장 깊은 감정을 전한다. 화려한 시작보다는 조용한 음악한 곡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려는 것이다.

Franz Schubert

Fantasy in f minor for Piano Four Hands, D.940

Piano 김정원 & 최이삭

슈베르트가 살았던 19세기 초 빈에서는 친구들이 모여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문화가 활발했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로 알려진 사적인 음악 모임은 음악이 거창한 공연장의 무대에 오라기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친밀한 예술이었음을 보여준다.

1828년,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작곡한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피아노 연탄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하나의 피아노 앞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연주하지만, 작품이 펼쳐 보이는 음악적 세계는 놀라울 만큼 광대하다.

애수 어린 첫 주제로 시작되는 환상곡은 서정적인 선율과 격렬한 감정, 극적인 긴장과 깊은 침묵 사이를 오간다. 네 개의 주요 부분이 중단 없이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처음의 선율은 마지막에 다시 돌아오며, 작품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완성한다.

이 곡은 슈베르트의 제자이자 후원자였던 카롤리네 에스테르하지에게 헌정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작품에 담긴 깊은 애상과 열정이 반드시 특정한 사랑의 고백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시작한 음악에 다른 사람이 함께하면서 독백은 어느새 대화가 된다. 그리고 그 대화는 때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에까지 이른다.

Edvard Grieg

Violin Sonata No. 3 in c minor, Op.45 · II. Allegretto espressivo alla Romanza

Violin 임지영 & Piano 김정원

슈베르트의 음악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았다면, 그리그의 음악에는 북유럽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자신의 음악 안에 고국의 자연과 민속적 색채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가 남긴 세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제3번은 1886년부터 1887년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앞선 두 소나타보다 한층 성숙하고 극적인 음악 세계를 보여준다.

오늘 연주되는 제2악장은 ‘로망스풍으로 표현력 있게’라는 지시와 함께 시작된다. 피아노가 조용히 문을 열면 바이올린이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로 응답한다. 두 악기는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받으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음악은 곧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중간 부분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리듬과 강렬한 에너지가 등장하며, 앞선 서정적인 분위기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선율이 돌아온다.

그리그는 이 짧은 악장 안에서 평온함과 열정, 고요함과 생동감을 자연스럽게 교차시킨다. 마치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서로 다른 감정들이 공존하듯, 음악은 하나의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Jules Massenet

M􀀀ditation from Tha􀀀s

Violin 임지영 & Piano 김정원

그리그의 음악에 이어지는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은 바이올린이 들려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가 1894년에 초연한 오페라 《타이스》의 제2막에 등장하는 이 곡은 원래 극의 전개 속에서 연주되는 관현악 간주곡이다.

오페라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여인 타이스와 수도사 아타나엘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속적인 삶을 살아온 타이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영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 바이올린의 선율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명상곡》은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소품이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가는 순간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되는 선율이 점차 고조되었다가 다시 평온함을 되찾는 과정은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들려주는 듯하다. 오늘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연주로 이 음악을 만난다.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덜어낸 자리에서 바이올린의 노래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피아노는 그 노래를 조용히 감싸 안는다.

Franz Liszt

Transcendental 􀀀tude No. 11 in D-flat major, S.139 · Harmonies du soir

Piano 김정원

음악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제11번, ‘밤의 선율’이다.

리스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표현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한 작곡가이자 연주자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단순히 화려한 기교의 세계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리스트에게 기교는 음악이 품고 있는 감정과 상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852년에 최종 형태로 출판된 《초절기교 연습곡》은 모두 열두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작품은 고유한 음악적 성격과 표현의 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중 제11번 ‘Harmonies du soir’는 흔히 ‘밤의 선율’로 번역되지만, 프랑스어 원제는 ‘저녁의 화음들’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울림과 신비로운 화성으로 시작되는 음악은 점차 풍부한 색채를 더해간다. 고요한 저녁 풍경처럼 펼쳐지던 선율은 어느 순간 거대한 음향의 물결로 확장되고, 피아노는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그 화려함에 있지 않다. 격렬한 감정의 고조 속에서도 처음의 서정성은 사라지지 않으며, 장대한 울림은 마침내 깊은 평온함으로 돌아온다.

슈베르트의 조용한 노래로 시작된 오늘의 음악은 이렇게 리스트의 광대한 음향 세계에 이른다. 하나의 피아노에서 시작해 네 손의 음악으로, 다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대화로 이어졌던 시간. 그 마지막에는 다시 한 대의 피아노가 남는다. 그리고 그 피아노는 지금까지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를 품은 듯, 저녁의 깊고 풍요로운 울림을 들려준다.